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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河南省의 龍門에 石窟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太和 18년(494)부터이다. 용문조상기는 그 數를 정확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淸朝末에 北碑가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탁본인들에 의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북위의 造像記나 墓誌는 北碑南帖論의 舌戰의 불꽃을 따라 斯界에 주목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이다.
서체가 전서에서 예서로, 다시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의사 전달의 매체로서 실용 위주의 것과 장식적인 의지의 것으로 양분되는 어간에 실용과 장식의 요소가 서로 교직되면서 더 한층 미적으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용문 석굴의 조상기 書品들이 바로 그 의지를 엿보게 해준다.
흔히 용문 조상기의 書를 북방 야만적인 솜씨의 素朴한 것으로 단정하여 임서를 함에 있어서도 거칠게만 쓰면 비슷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북위조상기를 배우는 사람은 북방쪽 사람들의 거칠은 붓놀림이라든가 刻字하는 정 끝의 흔적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잠긴 남방문화에의 동경이 스며있음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 북위 조상기의 여러 서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구성궁예천명이나 당나라 초기에 완성된 여러 해서의 깍아 놓은 알밤 같은 정돈된 그것과는 다른 어설픈 모습들이 20~21세기의 오늘의 눈에 오히려 애정으로 다가오는 묘미를 느끼게 되거니와 그것을 포착함으로서 創新에로의 밑거름을 삼아주었으면 하는 뜻으로 엮었다.